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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생활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투의 현장, 단양

by 상암의 왕 2008. 10. 15.

 

 자동차 동호회에서 단양 근처로 전국정모를 하길래 참석했는데....

 

 

 단양하면 나에게는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한 강역다툼이 연상된다.

 

 원래 고구려가 강성했을 시기(광개토대왕)에는 신라의 강역을 침범하는 금관가야를 토벌하러 충주와 단양까지

 

 세력을 뻐쳤고(중원고구려비) 이어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벌이느라 가야를 병합하고 위세가 커진 신라에게

 

 충주, 단양지역 및 한강하류지역을 침범당하기 까지 고구려와 신라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의 결말도 이 곳, 단양에서 맺어진다. (온달 장군의 전사)

 

 온달 장군은 고구려가 6세기, 중국 유목민족 국가와의 대립 및 내부갈등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신라의 진흥왕,

 

 거칠부에게 빼앗긴 이곳 충주와 단양 지역을 재탈환하고자 남진하다가 그만 이곳 단양에서 전사한 것이다.

 

 

 신라의 진흥왕은 통일전, 신라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정복군주이다. 고구려가 귀족간 내분 및 북방민족과의

 

 사투로 인해 남진정책에 소홀한 틈을 타, 이사부, 거칠부 등과 함께 한강하류 지역(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지역(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등을 공략하여 신라의 영토에 편입하고 직접 순수비 등을 세웠다.

 

 이때 단양 지역을 공략할 때 신하들이 세운 공을 치하하고자 세운 비석이 바로 단양신라적성비 이다.

 

 

 현재 단양신라적성비(일명 단양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된 가치있는 역사 유물이다. 광개토대왕비나

 

 중원고구려비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비석은 주로 큰 기둥의 형태를 띠나, 신라의 비석들은 장방형 자연석

 

 그대로를 깍아 이용하는 예가 많다.

 

 

 단양적성비를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에 들리면 휴게소 쪽문으로

 

 단양 적성(赤城) 유적지로 올라갈 수 있다. 가는 길은 계단으로 400미터 쯤 올라가면 된다.

 

 

 

 

 단양 휴게소의 전경. 오른쪽에 보이는 큰 도로가 중앙고속도로이다. 단양휴게소에서 쪽문을 넘어 산을 400미터 쯤 오르면 적성비가 있다.

 

 

 

 

 물론 휴게소를 거치지 않고 막바로 적성비 유적으로 올라오는 길도 있다. 멀리 차량이 정차된 곳이 휴게소를 거치지 않고 적성비로 온

 

 차량들이 주차하는 주차장이다. 오른쪽 공터로 보이는 곳은 단양휴게소의 일부이다.

 

 

 

 

 단양 적성비의 명문이 있는 전면부 모습. 당시 신라의 관직, 신분 등의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귀한 가치의 유물이다.

 

 

 

 

 발견 당시 훼손상태가 심해서였는지 뒷모습은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흉물스럽다.

 

 

 

 

 단양 적성(赤城)의 모습. 신라 진흥왕대 야이차(也以次)라는 적성지방 토호가 고구려로부터 적성을 공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적성비에

 

 명문되어 있다.

 

 

 

 

  단양 휴게소에서 우연히 발견한 네잎클로버.  그토록 찾으려 헤맬 때는 없더니 그냥 눈길이 가니 보이더라. 그래서 "행운"인가....

 

  나폴레옹도 우연히 네잎클로버를 보고 허리를 굽혔다가 적군의 총탄을 피했다는 일화로부터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했다고.

 

 

 

 

  단양 휴게소 뒷편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모를 열매. 너무 이뻐서 한컷.